선교사는 순교사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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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은 1782년 1월 5일, 영국의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8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모리슨은 15세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체험하고 선교잡지를 보며 해외선교를 꿈꾸게 되었다. 20세에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본격적인 선교사 준비를 하기 위하여 런던의 혹스톤·고스포트 아카데미를 거치는 중에 중국 소식을 접하고 중국선교에 대한 마음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다. 마침내 모리슨은 1805년 그의 나이 23세 때, 런던선교회에 중국 선교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모리슨은 중국선교를 준비하면서 1807년 1월 8일에 목사안수를 받았고 그 달 31일에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거대한 대륙, 중국 땅으로 들어가다
그러나 배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 땅에 들어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기에 모리슨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약 7개월이 넘는 고생스러운 여정을 거쳐 모리슨은 중국 남쪽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죽기를 각오한 땅에 힘 있게 첫 발을 내디뎠으나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 땅에 도착하는 것과 중국 땅에서 선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시 중국 안에서의 합법적인 선교는 불가하였다. 또한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인들이 동방 진출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었으며, 이미 인도에서 선교 문제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었던 동인도회사는 모리슨의 동태를 감시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압력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 있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광저우(Guangzhou)로 거처를 옮겨 이관(중국에 밀입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거기서도 당국의 감시와 이관 규칙들로 인해 그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졸지에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을 시작한 것과 같았다.
동인도회사에 들어가다
수용소를 나와 중국인과 같이 행세한 것도 잠시, 모리슨은 잠시 쉴 곳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중국인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에 짓눌렸다. 그래서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동인도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리슨의 취직 문제는 선교사가 식민사업과 결부되었다는 문제로 런던선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왔으나, 당시 선교회에서도 모리슨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일원이 된 이후 중국에서 공인된 지위를 얻게 되어 거주의 권리조차 없어 불안하던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고, 동인도회사로부터 받는 500파운드의 봉급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비밀리에 중영사서(中英辭書)의 편찬, 성서의 중국어역 및 교의해설서 저작 등에 힘쓰기 시작했다.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중국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의 인쇄 작업도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부처와 협력하여 말라카에 대규모 인쇄소를 설립했다. 1818년 이후의 인쇄는 주로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성경뿐 아니라 정기간행물도 발행하게 되었다. 거기서 인쇄된 성경은 주변 지역으로 배부됐다.
중국 선교의 기초를 설립하다
첫 번째 개종자는 그가 중국에 들어온 지 7년 만에 생겼다. 인내와 수고의 결실이었다. 모리슨은 17년간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우고, 성경 등의 문서작업과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824년, 건강 문제로 영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에도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국어강좌 등을 개설하여 강연을 했다. 이곳의 학생 중 한 명이 새뮤얼 다이어(Samuel Dyer)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장인이다. 1826년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과 영국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에 힘썼고, 중국어사전 3권, 중국어 신구약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 등을 남기고 1834년 52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은 평생을 중국에 헌신하며 중국 선교의 단단한 기초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가 번역한 중국어 한문성경을 들고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1866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는 이 한문성경을 가슴에 안고 조선 땅에 들어오자마자 대동강에서 순교함으로 성경이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모리슨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리슨의 중국 선교를 두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모리슨 씨, 중국에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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